[복거일 칼럼] 최인훈, 행복한 작가

입력 2018-08-19 18:43  

문명권의 주변부란 조건을 파고든 작가
진지한 풍토에 세운 박물관 같은 작품 남겨
지적 허기에 지친 이들 오래도록 찾을 것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학문은 자신의 근본적 문제를 인식했을 때 원숙해진다. 이것은 보기보다 어려운 과제니, 학문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한 뒤에도 한참 걸린다.

경제학의 근본적 문제는 ‘경제 체제를 이루는 요소들의 상호의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성배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어렴풋이 떠올린 뒤 여러 세기에 걸친 모색을 통해 19세기에 비로소 발견됐다. 그래서 슘페터는 ‘일반균형이론’을 처음 제시한 왈라스를 높이 평가했다.

다윈이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를 제시한 뒤에야, 생물학자들은 자신들 학문의 근본적 문제를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진화론은 생물학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의 바탕이 됐다. 물리학의 근본적 문제는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라 불리는 우주의 근본적 모형이다. 물리학자들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아우르는 이론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보편성을 지닌 학문과 달리, 종교와 예술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어느 종교든 처음엔 이단으로 출발한다. 차츰 신도들을 확보해서 정설로 자리 잡으면, 비로소 원숙해진다. 예술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근본적 조건을 다룰 때, 비로소 원숙해진다.

개항기 동양 3국은 ‘정복된 문명의 후예’로 전락했다. 우세한 서양 문명이 거세게 밀려들어오는 상황에선,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내는 것이 근본적 중요성을 지니게 됐다. 새로운 감수성과 총체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그 일에서 문학이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루쉰(魯迅), 이광수가 당시 일본, 중국,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은 이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세계는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됐다. 그 문명의 중심은 미국과 유럽이었고, 한반도는 주변부로 편입됐다. 최인훈은 이런 조건을 맨 먼저 뚜렷이 인식했고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썼다. 이 덕분에 그의 작품들엔 근본적 문제를 다룬 작품에만 따르는 위대성이 어린다. 그는 행복한 작가다.

그의 영정 앞엔 그의 전집이 놓여 있었다. 명성과 영향력에 비기면 작품들은 좀 단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그는 본질적으로 단편 작가였다. 단편이 많고 다양하고 뛰어나다. 장편으로 다룰 만한 주제들도 그는 단편 연작으로 썼다. 반면에 장편은 몇 편 되지 않는다.

어쩌면 거기에 그의 문학적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권의 주변부라는 조건을 진지하게 다루려면 긴 소설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는 2차 대전 뒤 가장 큰 국제전이었던 한국전쟁을 무대로 ‘일리아스’를 쓰려는 꿈을 품지 않았다. 그는 《광장》이나 《회색인》과 같은 ‘오디세이아’를 쓰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 조건을 다룬 작품들을 썼으므로, 그는 후배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쉽게도 그의 영향을 직접 받은 세대가 사라지면 그의 영향은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우리 사회가 나름으로 원숙해지면서 근본적 조건이 바뀐 것이다.

한 사회가 원숙해졌음을 알리는 징후는 대중의 득세다. 모든 분야에서 권위가 약화되고 전통적 가치가 허물어지면서, 대중의 발언권이 커진다. 대중은 전문가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의 취향과 판단을 앞세운다. 원숙한 사회에선 대중의 선택이 예술 작품의 가치에 대한 최종적 판단이 된다. 우리 문학에서도 이미 한 세대 전에 판매량이 작품의 가치를 재는 유일한 척도가 됐다. 자연히, 중요한 주제들을 진지하게 다룬 작품들은 독자를 찾기 어렵다.

앞으로 그런 경향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세계화는 우리 작가들이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길을 열어놓았다. 문명의 중심에 선 사람들에게 문명의 주변부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 작가들은 국내외 대중의 취향을 더욱 깊이 의식하게 될 것이다.

밤늦게 병원을 혼자 걸어 나오노라니,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수에 가까운 마음으로 나는 최인훈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폴 새뮤얼슨이 밀턴 프리드먼에 대해 한 얘기처럼, 최인훈은 “없었으면 만들어냈어야 할” 작가다.

그래도 마음이 쓸쓸하진 않았다. 문득 우리 사회의 근본적 조건들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사람들은 드물지만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지적 배고픔을 달래려고 그들은 무엇에 이끌리듯 최인훈의 작품들로 향할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진지한 풍토에 세워진 진지한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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